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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12.21 이 얼어 죽일놈의 사랑
  2. 2005.12.21 이 죽일 놈의 사랑 - dream
  3. 2005.12.08 안드로메다 걸
  4. 2005.11.16 쇼팽에 대해 2

이 얼어 죽일놈의 사랑










결국은 이 얼어 죽일놈의 사랑이었다. ^^

마지막이 16회라 빨리 끝나는 것 같아 아쉬워 하면서도 결말이 참 궁금했었는데..

난 그래도 해피엔딩의 여운을 좀 남기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내 생각에도 해피엔딩은 아무래도 제목과도 어울리진 않았다...

그렇다고 이유없이 누굴 어떻게 작가가 죽이게 만들까 생각해도 감이 안오고..

결국은역시나 작가다운 판타지로 끝을맺는구나 라는 느낌...

뭐... 드라마나 영화나약간의 판타지는 용서가 된다. 아니, 개인적으로 선호한다. ^^

결론은 그들의 가슴속에 있는 따뜻하고, 순수한 사랑이라는 거다.

이 드라마는 비가 나와서 보려고 하지 않았는데...

몇번 재방으로 보다가 흥미가 생겨 보게 되었다.

오히려 이 드라마 때문에 비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비의 연기력에 많이 감탄했다..

캐릭터를 이 만큼 소화할 연기자가 있을까...

자신이 가진 매력을 캐릭터로 극대화 시킬 수 있는 .. 정말진심이 담긴 연기를 보았다.

그러니까 비가 본래부터 가진 매력에 편승해서캐릭터를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비에의한, 비를 위한, 비의 드라마라고 불리우면 어떤가.

내가 본 바로는 이 드라마는 비(강복구)의 감정에 원래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거다.

강복구의 사랑의 감정을, 뒤틀려버린 상황속에서 심층적으로 느끼게 하려는 거다.

나역시 비는 비호감 이었는데도.. 이렇게이 드라마를 좋아하게 된 것을 보면.

연기자는 연기를 보여주는게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공감되게 만드는 것이 연기자의 능력인 것 같다. 매번 느끼지만..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걸 말한다.

연기자가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묻어 있어야 한다. 그러니 비슷한 느낌을 자아낼 수 있는

배우를 고르는 거지... 아무나 연기함으로써 그 캐릭터가 형성되고 공감을 주는건 아니다.

이건 배우가 가진 성향이나 느낌 , 매력등을 무시하고, 단지 배우와 캐릭터를 분리해서 바라보진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현실과 드라마를 구분못할 바보가 되는 건 아니니까 ^^

작가의 멋지고, 탄탄한 극적 구조와연기자들의 결코 어설프지 않았던 연기덕분에

빠져들수 있었던 드라마였다..

이 겨울 가슴을 뭉클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복구가 가진 캐릭터의 슬픔에 빠져들게 만들고..

이런 사랑도 있으면 정말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

감동도 느끼며..재미나게 보았다..

근래 우리나라드라마 본 것 중 가장 낫다.

시청률이 생각보다 안 나온게, 아쉽긴 하다..

난 내가 너무 재밌게 보아서 엄청 시청률이 좋은 줄로만 착각했다..

이 드라마는 수출하면 아마 더 많이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명작은 시공의 초월하니까.

난 이 작가분의 미안하다, 사랑한다 보다 이 드라마가 훨 나았다는 느낌이 들던데...

비, 신민아 연기가 어설프지 않아서 그것만으로도 미사보다는 완성도가 있었다.

아직 못 본 초반부를 봐야 하는데... 1,2부가 재미있었다는데, 기대된다.

명대사 ^^

나랑 같이 미쳐볼래요 ?
천벌을 받아도 내가 다 받을테니까
돌을 던져도 내가 다 맞을테니까
지옥이 있다면 잊지않고 갈테니까
나랑 같이 미쳐볼래요 ?

"딱 하루만..오늘 하루만 미치자..
다른데 보지도 말구.세수도 하지 말구..
이빨도 닦지 말구..잠도 자지 말구..
어떤 생각도 하지 말구..
무슨 생각도 하지 말구..
미안해 하지도 말구..
죄책감 갖지도 말구..울지도 말구..
딱 오늘 하루만 미쳤다가자..
딱 하루만 미쳤다가~~
넌 너대로, 난 나대로..
어떤 아쉬움도..어떤 후회도..
어떤 미련도 갖지 말자..
어떤 기억도 하지 말자..
.....
제대로 살자..돌아가선!!"

그래, 미쳤다...미쳐서 그랬다.
내가 미쳐서
강복구땜에 행복하구...
강복구땜에 설레구...
강복구땜에 지옥갔구...
강복구땜에 천국갔구...
강복구땜에 강민구.. 다 잊구...

"은석:언제부터였어요??
언제부터 내가 좋았어요?
언제부터였어요?
그냥 계속 미워만 하지...
그냥 계속 미워만 했으면 좋았을텐데
그러면 이렇게 힘들지도 않았을텐데..
복구: 처음 봤을때부터..
너~~처음 봤을때부터!"

살아오면서 두번째로 힘들었을때, 은석이 가슴에 상처주고 은석이 눈에 눈물나게 했을때..
살아오면서 두번째로 기뻤을 때, 은석이가 날 용서해줬을 때..
살아오면서 두번째로 행복했을 때, 은석이가 나같은 놈을 그래도 사랑한다고 해줬을 때..
고맙다.. 춥지 않았어..따뜻했었어..
형이 있어서,,다정이가 있어서,, 니가 있어서,,
참 따뜻했었어.. 세상은...
고맙다.. 마음껏 사랑하게 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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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메다 걸

Andromeda Girl - Jelly boy -

그냥 우연히 듣게 됐는데, 괜찮은 것 같다. ^^

안드로메다 하면 은하철도 999가 생각나네..

메텔과 철수였나..

몇년전일까?? tv에서재방해서 본 기억이 있는데,

보면서 꽤나 철학적인 만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땐 무슨 생각으로 이 만화를 봤던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만든이의 상상력은 참으로 무한하다. ^^

음.. 슬픈 만화였다.

엔딩이 어떤건지 스토리를 모르겠다.

공중파에서 한번 다시 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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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에 대해

쇼팽-피아노곡 〈즉흥환상곡〉
쇼팽[Frederic-Francois Chopin]
(폴)Fryderyk Franciszek Szopen.

1810. 3. 1 바르샤바 근처 젤라조바볼라~1849. 10. 17 프랑스 파리.




쇼팽, Eugene Delacroix가 그린 초상화(부분), 파리에 있는 Musee du Louvre 소장


낭만주의 시대 폴란드 태생 프랑스의 작곡가·피아니스트.

피아노 협주곡과 55곡의 마주르카, 13곡의 폴로네즈, 24곡의 전주곡, 27곡의 연습곡, 19곡의 야상곡, 4곡의 발라드, 4곡의 스케르초를 포함한 피아노 소품들로 유명하다. 뛰어난 상상력과 섬세한 장인 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음악에 있어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폴란드로 이주한 프랑스인인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스는 젤라조바볼라의 스카르벡 가문을 포함한 여러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으며 스카르벡 집안의 가난한 친척과 결혼했다. 쇼팽이 태어난 지 8개월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바르샤바에 있는 학교의 프랑스어 교사가 되었으며 쇼팽 자신도 1823~26년 그 학교에 다녔다.가족 모두가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아기의 쇼팽도 항상 그의 어머니나 누나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이상한 행동을 하곤 했다. 6세 무렵에 이미 그는 그가 들었던 것을 재현하려고 하거나 새로운 선율을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다음해 그는 61세의 보이체크 (아달베르트) 지브니 밑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브니는 당시 유행하던 근대의 기교파 작곡가들과 바흐, 모차르트 및 베토벤의 가치를 비교·고찰하는 명민한 감각을 소유했던 다재다능한 음악가였다.

쇼팽은 어려서부터 개인의 저택에서 열리는 저녁음악회에 초청되었고 8세에 공공 자선연주회에서 처음으로 공개연주를 가졌다. 3년 후 의회 개회를 위해 바르샤바에 온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앞에서 그는 새로운 종류의 오르간인 에올로멜로디콘(지방 음악가가 고안)으로 즉흥 연주를 했다. 신동으로서의 명성은 연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7세에 그는 폴로네즈 G단조를 작곡하여 출판했으며 곧 그가 작곡한 행진곡이 콘스탄틴 대공의 마음을 끌어 대공 자신의 군악대가 행진할 때 이 곡을 쓰도록 했다. 그밖에 폴로네즈·마주르카·변주곡·에코세즈(활기찬 스코틀랜드 춤곡)·론도(주요부분이 반복되는 음악 소품) 등을 계속 작곡했으며 그결과 그가 16세가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그를 새로 설립된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시켰다. 그 음악원의 교장은 폴란드의 작곡가 요세프 엘스너였는데 쇼팽은 그에게 여러 해 동안 음악이론을 배웠다. 쇼팽에 있어 엘스너는 최상의 선생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낭만주의적 경향의 작곡가로서 전통적인 교육을 강조하면서도 쇼팽의 독창적인 상상력을 단순한 제도적 교육의 테두리에 가두어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샤바의 활기찬 음악생활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보다 폭넓은 음악적 경험을 필요로 했다. 재정적 보조 요청에 대한 정부의 거절에도 좌절하지 않고 쇼팽의 헌신적인 부모는 그를 빈으로 보낼 수 있는 돈을 구했다.

엘스너의 소개로 쇼팽은 곧바로 빈의 출판업자인 토비아스 하슬링거에게 갔으며 하슬링거는 쇼팽이 선전을 위해 무료로 공개연주회를 갖는다는 조건으로 그가 작곡한, 모차르트의 〈라 치 다렘〉 주제에 의한 변주곡들을 출판할 것에 동의했다. 빈에서 새로 사귄 다른 친구들도 그의 무대 출연을 주장했고 그결과 쇼팽은 1829년 8월에 2번의 연주회를 가졌다. 지나치게 섬세한 터치로 청중들에게 약간의 충격을 주기는 했지만 그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며 환영 인파의 광적인 소란 속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소란은 그가 가능한 한 빨리 돌아감으로써만 완전히 진정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1829년 9월 바르샤바로 돌아온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의 매력적이고 인기있는 젊은 성악도인 콘스탄티아 글라드코프스카와 사랑에 빠졌다. 이 시기의 그에게 있어 영감의 원천은 사람의 목소리(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에 포함된 것)로, 아름다운 선율과 현란한 장식이 있는 야상곡과 시적인 기교를 보여주는 2개의 피아노 협주곡의 서정악장들도 이때에 작곡되었다. 1830년 3월 피아노 협주곡 2번 F단조 연주로 성인으로 바르샤바 데뷔를 했다. 그는 이 협주곡의 느린 악장을 콘스탄티아를 추억하여 작곡했다고 고백했다.

1830년 11월말 빈에서 쇼팽은 대중의 취향이 너무 피상적이고 하슬링거가 자신의 작품을 계속 출판하는 모험을 주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아무도 다투어 그를 연주회에 초청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더 많은 공부를 하려 했을 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도 없었으며 이미 그의 부모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경제적 부담을 주었다는 것도 알았다. 폴란드가 러시아에 대항해 봉기했다는 소식은 모두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의 가족은 그가 돌아와 싸움터로 나가기를 원하지 않았고 빈 사람들은 그의 개인적인 문제인 민족적 갈등에 대해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는 곧 보다 이상적인 환경을 찾아 파리로 향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 여권 발급이 늦어지는 지루한 기간 동안 그는 애국적인 시에 곡을 붙이거나 〈스케르초 B단조〉 작품 20과 〈혁명 연습곡〉 작품 10·12와 같은 격렬한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하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결국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해 바르샤바가 러시아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절망으로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1831년 9월말경에 파리에 도착한 그는 그 규모와 함께 '화려함과 추잡함, 미덕과 악덕'의 극치에 압도당했다. 그러나 곧 폴란드 밖의 그 어디에서도 혈족의 끈끈한 유대감을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빈에 있는 친구의 소개로 파리의 연주 무대에서 성공한 인물들과 사귈 수 있게 되었지만 쇼팽은 곧 많은 폴란드 이주민들과 프란츠 리스트, 엑토르 베를리오즈, 펠릭스 멘델스존, 빈센초 벨리니를 포함한 보다 젊은 세대의 작곡가들과 첼로 연주자 오귀스트 프랑콤에게서 정서적인 동질감을 발견했다. 파리에서 먼저 부딪힌 문제는 직업과 재정적인 문제였다. 카미유 플레옐의 살롱에서 1832년 2월에 있었던 데뷔 연주와 음악원 대강당에서 5월에 있었던 연주 이후, 그는 건반을 다루는 데 있어서의 극단적인 섬세함으로 인해 보다 큰 공간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취향에 부합할 수 없음을 알고 낙심했다. 그러나 금융업을 하는 부유한 로트쉴드 가족과 만나게 됨으로써 갑자기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 우아한 매너와 세련된 옷차림, 타고난 감각의 소유자인 쇼팽은 연주가·음악교사로서 파리의 대저택에서 가장 환영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 시기에 작곡된 피아노곡으로는 놀랄 만큼 시적인 2권의 연습곡집 〈발라드 G단조〉·〈즉흥 환상곡 Fantaisie-Impromptu〉, 쇼팽의 강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마주르카와 폴로네즈 등 작은 소품들이 있다.

1835년은 개인적인 이유에서 기억할 만한 해였다. 쇼팽은 보헤미아의 카를스바드에서 그의 부모와 함께 짧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낸 후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가서 오랜 폴란드 친구인 보드진스키 일가를 만났는데 그는 그 집안의 딸인 매력적인 16세의 소녀 마리아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쇼팽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소문을 들은 보드진스키 부인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크게 상심한 쇼팽은 친구 플레옐과 함께 영국으로 짧은 여행을 했는데 파리에 돌아왔을 때 그에게는 또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1836년 가을 리스트와 그밖의 문학하는 친구들과 함께 쇼팽은 선정적이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여류 소설가인 조르주 상드(오로르 뒤팽 혹은 뒤드방 부인)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스스로 원해서 그의 정부가 되었다. 처음에는 마리아에 대한 애정, 파리 사람들의 소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망설였지만 1838년 가을, 결국 그의 도덕적인 양심의 가책을 너무나 고지식한 것으로 생각하는 상드와 그녀의 아이들인 모리스, 솔랑주와 함께 겨울을 보내기 위해 마요르카 섬으로 갔다. 그들은 팔마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조촐한 별장을 빌려 목가적이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나 얼마 안 가서 행복한 생활은 끝나고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가 결핵이라는 소문이 별장 주인에게 전해지자 그들은 그곳에서 쫓겨났으며, 멀리 떨어진 발데모사의 마을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프랑스 영사의 배려에 그들 자신을 맡겨야만 했다.

추위와 습기, 영양실조, 게다가 그들의 이상한 관계에 대한 그곳 사람들의 의심과 제대로 된 연주용 피아노의 부재는 쇼팽의 작품활동에 지장을 주었으며 그의 위태로운 병세를 더욱 악화시켰다. 상드는 즉시 그곳에서 떠나야만 그의 생명을 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1839년 3월초에 마르세유에 도착했으며 훌륭한 내과의사의 도움으로 쇼팽은 불과 3개월 만에 충분히 회복되었고 파리로 돌아갈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들은 파리 남쪽으로 290km 정도 떨어진 노앙에 있는, 상드가 좋아하는 시골집에서 1839년 여름을 보냈다. 쇼팽 역시 처음에는 장미꽃이 피고 나이팅게일이 노래하는 한적한 정원에 매혹되었지만 자신이 전원생활에는 적합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1841년 4월 첼로 연주자인 친구 프랑콤과 메조 소프라노 폴린 비아르도가 함께 출연하는 연주회에 앞서 계획된 플레옐의 저택에서 파리 귀환을 알리는 반(半) 공개연주회에 초청되어 파리로 돌아왔고, 또한 튈르리궁에서 루이 필리프 왕을 위해 연주회를 열도록 부탁받기도 했다. 이 연주회를 통해 경제적인 대가를 얻었지만 정신적인 압박은 너무나 컸다. 그는 안정된 수입원을 얻기 위해 다시 개인교습을 시작했다. 피아노 레슨에서 그는 손목과 팔의 유연한 움직임을 강조했으며, 아름답고 노래하는 듯한 소리를 만드는 것을 가장 필수적인 조건으로 삼아 민첩한 손놀림을 위해 과감하게 비전통적인 운지법을 사용하게 했다. 점차 새로운 작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으며 출판업자를 상대하는 솜씨도 능숙해짐에 따라 그는 좀더 여유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항상 건강이 좋지 않았다. 쇼팽에 대해 모성애적인 태도를 갖게 된 상드는 매년 여름(1840 제외) 그를 노앙으로 데려가 신선한 공기를 쐬며 휴식하게 했다. 폴린 비아르도와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 등 절친한 친구들도 초대되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1844년에는 쇼팽의 누이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다. 쇼팽은 〈환상곡 F단조(1840~41), 〈바르카롤레〉(1845~46), 〈환상 폴로네즈〉(1845~46), 〈발라드 A장조〉(1840~41), 〈발라드 F단조〉(1842), 〈소나타 B단조〉(1844) 등과 같은 소품과 그밖에 보다 규모가 큰 작품 등 자신의 작품 중 상당수를 노앙에서 작곡했다. 노앙에서 평온을 되찾았고 완벽을 추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음악적 아이디어를 보다 길고 복잡하게 발전시키려고 노력했으며 심지어는 대위법을 보강하기 위한 음악적 논문을 구하러 파리로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의 화성 어법은 훨씬 대담해졌는데 그러면서도 감각적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그는 평생토록 감각적 아름다움을 좇았으며 묘사적 제목이나 '표제'에 대한 암시 수법을 아주 싫어했다. 쇼팽이 좀더 안정된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노앙에서 보낸 여름생활들을 훨씬 잘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오히려 상드와의 긴장된 관계로 인해 점차 우울해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1847년 여름 더이상 노앙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이듬해에 결국 상드와 헤어졌다. 둘은 재결합을 원했으나 자존심 때문에 이러한 바람은 끝내 무산되어 버렸다.

상드와의 결별이 가져다준 정신적 파탄과 1848년 2월 16일 플레옐의 저택에서 있었던 연주회(새로 작곡한 첼로 소나타를 프랑콤과 함께 연주함) 이후 불과 며칠 사이에 파리에서 발발한 혁명으로 인해 낙담한 쇼팽은 그를 숭배하는 44세의 스코틀랜드인 제자 제인 스털링의 초청을 수락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방문했다. 그해 부활절과 8월 사이에 3대의 그랜드 피아노를 놓을 수 있을 만큼 크고 우아한 방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필하모닉 협회에서 제안한 직책을 포함한 모든 고정 직책에 대한 제의를 거절하고는 런던 순회 레슨과 파티 참석에 열을 올렸다. 토머스 칼라일, 찰스 디킨스, 제닌 린드와 같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예술을 단지 신분의 상징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많은 외국인들과의 접촉에서 오는 긴장을 조금은 경감시켜 주었다. 그러다가 한여름에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스코틀랜드로 탈출해서 에든버러, 글래스고 및 스털링 근처에 있는 스털링 귀족 가문의 몇몇 친척 집에서 쉬었다. 그러나 점점 쇠약해지고 향수병에 시달려 스털링의 헌신적 애호에 보답할 수 없다는 난처한 생각에 빠져들게 되면서 작곡을 할 수 없게 되었다. 3주 동안 런던에 돌아와 있으면서 그는 폴란드 난민을 위한 자선무도회에서만 연주했으며 11월 24일 파리로 돌아왔다. 다음해 봄 건강이 악화되자 의사는 보다 맑은 공기를 위해 샤요 교외로 나갈 것을 권했고 친구들의 재정적 도움으로 요양을 하게 되었는데 나이든 그의 어머니까지 2,000프랑을 보내왔다. 1849년 8월에는 누이가 찾아왔으며 파리 중심부의 넓은 새 아파트로 돌아온 후 마지막 남은 몇 달 동안 보고 싶어하던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남은 생을 보냈다. 쇼팽은 폴란드 사제로부터 종부 성사를 받고 자신의 미완성 악보를 파기할 것과 그의 장례식에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연주하도록 유언했으며 그의 마지막은 평온했다. 장례식은 10월 30일 마들렌 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식후에는 애도객들이 페르라셰즈 공동묘지까지 그의 관을 뒤따랐다. 1년 후 깨진 리라를 들고 슬퍼하는 뮤즈를 조각한 기념비가 제막되었을 때 폴란드에서 가져온 흙이 그의 무덤 위에 뿌려졌다.

비록 폴란드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아 엘스너를 실망시켰고, 파리 귀족들의 응접실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함으로써 폴란드의 망명 애국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를 낙담시켰으며, 규모가 큰 학구적인 업적으로만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는 기성 비평가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가치는 보다 통찰력있는 동시대인들에 의해 즉각적으로 인식되었다. 당시의 다른 비평가들은 절묘한 기교와 조화된 놀라운 독창성에 감탄했다. 오늘날 그는 인간 내면의 은밀한 곳을 보는 통찰력과 피아노에서 끌어낼 수 있는 신비롭고 새로운 음향의 발견으로 인해 불멸의 음악인들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그는 개성적인 선율을 만들었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드문 재능을 가졌지만 결코 감상적으로 흐르지는 않았다. 비록 그 본질에 있어서는 낭만적이었지만 쇼팽의 음악에는 낭만주의의 치장이 전혀 없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고전적 순수함과 신중함이 있다.

J. Chissell 글

<출처: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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